문제가 터졌을 때, 진짜 리더는 규제 대신 권한을 넘긴다

교회가 빠르게 자랄 때, 우리는 오래도록 그것을 축복의 증거로만 읽었다. 사람이 모이고 자리가 차고 예배가 뜨거워지는 것 — 그것이 건강의 신호라고 믿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붐비는 공간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조용히 자리를 뜨는 장면. 성장의 축포 뒤편에서, 명단에서 소리 없이 빠지는 한 사람.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렇게 묘사한다.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원어의 결을 살리면, 한 번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불어나는 중이다. 오순절의 삼천 명, 그 뒤의 오천 명, 이윽고 숫자 세는 일조차 포기한 공동체. 우리가 “초대교회처럼”이라 말할 때 그리는 바로 그 이상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갈등이 터졌다. 우리는 오래 이것을 오해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아직 덜 성숙해서라고, 더 기도하고 더 자라면 갈등은 사라질 거라고.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한다. 가장 뜨겁고 가장 빠르게 자라던 그 교회에서 갈등이 났다. 성장이 갈등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이 갈등을 만든다. 사람이 늘면 필요가 늘고, 필요가 늘면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가 생긴다. 어쩌면 갈등은 병든 교회의 증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의 통증인지도 모른다.
문제의 진원은 한 문장에 담겨 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졌다.” 우리는 이 단어 앞에서 자주 멈춘다. 원어 παρεθεωροῦντο는 “지나쳐서 보다”, 미처 못 보고 넘어간다는 뜻이고, 무엇보다 수동태다. 누가 그들을 배제했는지,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악의가 아니었다. 아람어를 쓰는 다수 중심으로 굴러가던 구제의 손길이, 폭발적으로 불어난 숫자를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소수였던 헬라파 과부들이 조용히 사각지대로 밀려났다. 악의가 아니라 맹점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결과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들이 “원망했다”고 적을 때 쓰는 단어 γογγυσμός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쏟아냈던 바로 그 원망이다. 새 출애굽 공동체인 교회가, 옛 이스라엘이 무너졌던 그 지점에 다시 서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본문의 헬라파 과부는 1세기 예루살렘의,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와 헬라어를 쓰던 특정한 사람들이었다. 유대 땅 토박이인 히브리파와는 언어도 문화도 예배하는 회당도 달랐던, 그 시대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긴장이다. 그들을 곧바로 오늘의 누군가와 같다고 등치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것은 본문의 주해가 아니라 적용이다. 다만 그 구조적 맹점의 원리를 우리 자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히든 피겨스》. 1960년대 나사(NASA), 인류를 우주로 보내려던 그곳에 그 시대 최고의 두뇌를 가진 흑인 여성 수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화장실 하나를 쓰려고 800미터 떨어진 건물까지 뛰어가야 했다. 누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구조였다. 그 “당연함” 속에서, 인류를 달로 보낼 천재들이 매일 소외되고 있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우리 공동체에도 ’헬라파 과부’가 있지 않은가. 오래된 성도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새가족에게는 넘기 어려운 벽일 수 있고, 뒤에서 이름 없이 섬기는 이가 정작 중요한 자리에서는 빠져 있을 수 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가 받쳐 주지 않으면 선의조차 배제를 낳는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어떻게 했나. 우리는 그들의 반응 앞에서 매번 놀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이 말을 식탁 섬김을 하찮게 여긴 것으로 읽으면 오해다. 1절의 ’매일의 구제’와 4절의 ’말씀 사역’은 원어로 같은 단어, διακονία다. 식탁을 섬기는 일도, 말씀을 전하는 일도 똑같이 디아코니아. 칼뱅은 사도들이 접대를 우습게 여겨 버린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 소명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일을 나눈 것이라고 풀었다.
이것이 조직을 더 효율적으로 굴리기 위한 경영 기법이 아님은 굳이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모든 직무가 다 주님 안에서 거룩하기에, 각자가 받은 소명에 가장 온전히 헌신하도록 직분을 나눈 것이다. 기준은 효율이 아니라 소명이었다.
그리고 통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시 오랫동안 강한 리더라면 모든 것을 직접 붙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통제의 우상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일을 맡기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사람이 우리 뜻대로 우리 방식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며 상황 전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 겉은 위임인데 속은 여전히 우리가 다 쥐고 있다. 우리가 정말 내려놓았는지는, 맡긴 사람이 우리와 다르게 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사도들은 정말로 손을 폈다. 뽑힌 일곱 사람의 이름 —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 은 전부 헬라식이다. 상처 입고 소외당했던 바로 그 쪽 사람들에게, 다수였던 지도부가 구제와 분배의 권한을 통째로 넘겼다. 문제를 일으킨 쪽을 의심하고 통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앞자리에 세웠다. 규제 대신 권한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뜻밖의 문장으로 매듭짓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우리는 이 문장의 주어를 오래 들여다본다.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가 먼저 나올 법한데, 첫 주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 “왕성하다”는 원어로 ηὔξανεν, 씨앗이 자라 열매 맺는 그 “자라다”이다. 사도들의 수완도, 일곱 집사의 유능함도 아니었다. 말씀이 스스로 살아 움직여 교회를 자라게 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위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사도들이 손을 편 것은 말씀이 주어가 되도록, 말씀이 자랄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서였다. 존 스토트의 말처럼 그 위임은 사도들이 말씀의 우선순위를 지켜 낸 영적 승리였다. 위임은 목적이 아니라, 말씀이 주어가 되게 하는 길이었다.
사도들은 어떻게 그렇게 손을 펼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들이 이미 그렇게 하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심이라 하실 때, 그 “섬기려”가 바로 디아코니아다. 하늘 보좌를 가지신 분이 가장 낮은 식탁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섬기셨다. 그분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도 손수 다 나누지 않고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위임은 포기가 아니라 신뢰였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원수 되었던 이들이 한 식탁에 앉을 길을 여셨다.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십자가가 그 담을 헐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붐비는 공간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던 한 사람. 이제 우리는 그 자리를 조금 다르게 본다. 그를 다시 부르는 일은 우리의 유능함에 달려 있지 않다. 자라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 —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해야만 이 공동체가 돌아간다”는 생각은 결국 우리를 지치게 한다. 우리 성과로 우리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그러니 증명하려고가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이 넘쳐서 섬기면 된다. 규제 대신 권한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다 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 자유가 어디서 오는지, 이제 우리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