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혼자 가지 않으려면

누군가 힘들다는 말을 꺼낼 때, 우리는 “기도할게요”라고 답합니다. 그 말은 진심입니다. 그런데 그 말 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 믿음, 말만 있고 정작 건넬 것이 나오지 않는 그 믿음을 두고 “죽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한 장면이 나옵니다. 헐벗고 오늘 먹을 것이 없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 말이 무례한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대에 이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이자 기도였습니다. 평안하시라고, 따뜻하시라고, 배부르시라고 빌어 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 형제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다가갔고, 말을 걸었고,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기서 놓치기 쉬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어떤 나쁜 자가“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라고 썼습니다.
이건 특정한 누구를 지목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저 사람 이야기네” 하고 물러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일상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누가 “괜찮아?” 하고 물으면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대답합니다. “응, 괜찮아.” 그리고 물었던 사람도 그 대답을 듣고 그대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묻는 쪽도 진심이었고, 대답한 쪽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이 진실을 가린 것이 아닙니다. 말이 진실을 덮은 채로 끝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보고도 보지 못합니다
1999년에 두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짧은 영상을 보여 주고 한 가지만 시켰습니다. “흰 옷 입은 팀이 공을 몇 번 주고받는지 세십시오.”
사람들은 열심히 셉니다. 그리고 대부분 정확히 맞힙니다.
그 사이 영상 한가운데로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 들어옵니다.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화면 한복판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두드리고, 다시 걸어 나갑니다. 구 초 동안입니다.
실험이 끝나고 물었습니다. “고릴라 보셨습니까?”
절반은 못 봤습니다.
이 실험에는 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흰 팀을 세라고 하면 고릴라를 본 사람이 27퍼센트입니다. 그런데 검은 팀을 세라고 하면 58퍼센트가 봅니다.
같은 영상입니다. 같은 눈입니다. 고릴라가 검은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실험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덜렁댄다”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세고 있느냐가, 내가 무엇을 못 보는지를 정합니다.
야고보서의 그 형제는 화면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몸에 쓸 것“이었습니다.
보고 있는데 안 보입니다.
말은 도구가 아니라 출구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은 우리가 만들어서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자리입니다. 그 앞 절에서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만들어 쓰는 도구가 아니라, 그 나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짜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세 곳을 나란히 놓아 보면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열두 해 앓던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리고 야고보서 2장의 그 사람도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여인은 이미 나았습니다. 그 여인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일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평안히 가라”가 왔습니다.
야고보서의 그 사람에게는 그 앞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차이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 앞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
야고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모자란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약한 믿음”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종류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답은 “조금 더 열심히”가 아닙니다. 죽은 것은 더 열심히 해서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야고보는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위를 묻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다만 의롭다 하는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행함이 나오는 것이지, 행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볼 수 없습니다
아까 그 실험에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릴라를 못 본 사람들은 자기가 못 봤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고릴라 있었잖아요” 하고 짚어서 물어도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몇 사람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비디오를 다시 틀어 줄 때까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봅니까.
누가복음 22장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바로 그 자리입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예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책망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셨을 뿐입니다.
말이 사람을 무너뜨린 그 자리에서, 말 없는 시선 하나가 그를 다시 세웁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도망갔던 사람들이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잘 보게 되어서 그분이 함께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함께 계셔서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 말이 혼자 가지 않습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만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건네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지 못한 그 “몸에 쓸 것”을, 그분은 자기 몸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누가 나를 끝까지 봐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애쓰지 않아도 줄 것이 생깁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자기가 세던 것에서 눈을 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그리고 보이면, 손이 나갑니다.
“기도할게요”는 나쁜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이 혼자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이 채워지면 그 말이 혼자 가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데리고 갑니다. “기도할게요” 뒤에 한마디가 더 붙습니다. “언제 시간 되세요?” 그리고 그다음 주에 실제로 그 시간이 비워집니다. 거기까지가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보지 못하는 자리를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건 야단이 아닙니다. “그 사람 요즘 힘들대요.” 이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꺼져 있던 화면을 다시 켜 주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단이 아니라 다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2026년 8월 23일 디딤교회 주일예배 설교 「먼저 보신 분이 함께 계십니다」(야고보서 2:14-17)를 바탕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