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켜쥘 이유가 없어졌다

한 사람은 떠나며 “닭 한 마리를 갚아 달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둘 다 다시 못 볼 사람들에게 남긴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남은 빚을 가리켰고, 하나는 이미 받은 것을 가리켰습니다.
갚아 다오, 그리고 기억하라
2400년 전 아테네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독배를 마십니다. 제자들이 둘러앉아 마지막 말을 기다립니다.
“크리톤, 우리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갚아 주게. 소홀히 하지 말고.”
아스클레피오스는 그 시대 사람들이 병을 낫게 해 준다고 믿던 신입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들이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것은 갚아야 할 것 하나였습니다.
그로부터 450년쯤 뒤, 같은 말을 쓰던 세계의 어느 항구에서 또 한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는 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급한 길이었는데도 사람을 보내 예전에 함께 일하던 이들을 불렀습니다. 오십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오가야 했으니 여러 날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만큼 남겨야 할 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남긴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둘 다 떠나며 남긴 부탁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갚아 달라는 말이었고, 하나는 기억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맡아 준 화분
이웃이 한 달쯤 집을 비우면서 화분 하나를 맡기고 갑니다. 물만 주면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물만 줍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새 잎이 납니다. 잎이 나니까 자리를 옮겨 주게 되고, 볕이 좋은 날에는 창가로 내놓게 되고, 흙이 굳은 것 같아 분갈이까지 하게 됩니다. 사진도 몇 장 찍습니다.
한 달이 지나 이웃이 돌아옵니다. 화분을 건네주는데, 이상하게 조금 서운합니다.
그 마음에 이유를 달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만큼 키웠는데.
맡은 것이 언제 내 것이 되었는지, 그 순간은 잘 짚이지 않습니다. 정성이 소유감으로 넘어가는 자리에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잘 돌볼수록 더 빨리 넘어갑니다. 무심하게 물만 주었다면 서운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일은 넘겼고, 대접은 남겼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첫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백 년이 넘은 작품인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됩니다.
리어 왕이 나이 들어 나라를 세 딸에게 나눠 주기로 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결심입니다. 그런데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다만 우리는 왕의 이름과, 왕에게 딸린 모든 예우는 그대로 갖는다. 통치와 재정과 집행, 그 나머지는 너희 것이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더 답니다. 기사 백 명은 계속 거느리겠다고.
일은 넘겼고, 대접은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평생 그 무게를 졌으니까요. 그래서 이 장면이 우습지 않고 서늘합니다.
우리는 두 종류의 받음을 정반대로 대합니다. 궁핍해서 받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자리로 받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이 마음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자기보상과 자기소유입니다.
말로 옮기면 이렇게 들립니다.
내가 이만큼 책임졌으니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 내가 세웠으니 내 것이다. 내가 희생했으니 내 뜻이 존중받아야 한다.
교회에서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맡겨진 것을 어느 순간 내 몫과 내 권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권력이나 인정을 향한 욕심은 그 뒤에 열매처럼 따라 나오는 것이지 뿌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책임을 졌고, 시간과 힘을 들였으며,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존중과 배려를 기대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바울이 경계한 것도 도움을 받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정당한 기대가 사람을 돌보는 목적보다 앞서고, 맡겨진 자리를 “내가 대가를 받을 권리”로 바꾸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결심하면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려놓은 다음에 곧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까지 내려놓았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가?”
섬김조차 다시 보상을 요구하는 청구서가 됩니다.
그래서 이 뿌리는 결심만으로 뽑히지 않습니다. 그 말이 대체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만큼 한 것이 맞으니까요.
그가 서 있던 자리
다시 그 항구로 돌아갑니다.
그 시대에 베푸는 일은 명예와 의존 관계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후원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었고, 받은 사람에게는 갚아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얼마든지 자기 자리를 쌓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이 손으로” 자기와 동행들이 쓰는 것을 감당했고, 그 수고로 약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가 불러 모은 이들에게 붙은 이름은 살피는 사람, 돌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자리를 곧바로 먹이는 일로 풀어 놓습니다. 돌보라는 말은 본래 양을 먹이는 말이었습니다. 살피는 자리는 소유하고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먹이는 자리였던 셈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그 마지막 부탁이 달리 들립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헌금에만 관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맡은 사람이 끝내 받는 자가 될 것인가 주는 자가 될 것인가, 그 질문이었습니다.
값은 이미 치러졌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가 그날 남긴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샀다는 것은 값을 치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값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보던 사람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세운 공동체가 아니고, 내가 키운 아이가 아니고,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맡은 사람입니다. 맡아 키운 화분을 돌려줄 때 드는 서운함도 결국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살피라는 말을 먼저 했습니다. 돌볼 대상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돌보는 사람을 울타리 밖에 세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돌보는 사람 역시 먼저 돌보심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부터 그렇습니다.
받을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두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신분입니다. 그리고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기업은 벌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상속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이 “내 것”인데, 하나님은 그 자기 것을 먼저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주는 것이 복되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없는 윤리를 만들어 요구한 것이 아니라, 벌어진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받을 것이 이미 정해진 사람에게는, 움켜쥘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배까지 따라 나온 사람들
이야기의 끝은 이렇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무릎을 꿇어 함께 기도했고, 사람들은 크게 울며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 때문에 더 근심하면서, 배에까지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부탁은 명령이 아니라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어느 자리에서 그 마음이 드는지 생각해 봅니다. 대개는 아주 사소한 자리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 마음이 상하는 자리, 내가 들인 시간을 속으로 세고 있는 자리.
무조건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기억하십시오. 그 자리는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자리이고, 나의 최종적인 몫은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받은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건네며 살 수 있습니다.
맡았던 화분은 결국 이웃의 창가로 돌아갑니다. 지나다 보면 거기 꽃이 피어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데도, 아니 내 것이 아니라서, 그 꽃이 반갑습니다.
이 글은 2026년 8월 30일 디딤교회 주일예배 설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사도행전 20:28-35)를 바탕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