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한 끼

지난주 설교를 준비하며 마태복음 25장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멈췄습니다. 다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이 오른편 사람들에게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였을 때 맞아 주었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왕은 자기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일이 곧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 덧붙입니다. 제가 멈춘 곳은 왕의 말이 아니라 그다음, 그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으쓱하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언제 그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되묻습니다.
이 반응이 낯설었습니다. 저는 제가 한 일을 꽤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도왔는지, 그날 제가 얼마나 바빴는지까지 압니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 텐데 그 기억은 어느새 떳떳함보다 장부에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는 계산이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뜻밖의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왼편 사람들도 똑같이 되묻습니다. 언제 그런 처지를 보고도 모른 척했느냐고요. 두 무리 모두 몰랐습니다. 한쪽은 자기가 한 일을 몰랐고 다른 쪽은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몰랐습니다. 알아보는 눈이 있고 없고가 두 무리를 가른 게 아니었지요. 다만 왼편의 되물음에는 주님인 줄 알았다면 했을 것이라는 셈이 깔려 있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누구에게 할지를 골라 온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오래 붙든 것은 순서였습니다. 왕은 오른편 사람들에게 먼저 나라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둔 나라입니다. 한 일은 그다음에야 나옵니다. 잘해서 받은 나라가 아닙니다. 받은 나라가 먼저 있었고, 사람을 대하던 방식은 그 나라에서 나온 열매에 가까웠습니다. 한 일이 가볍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일이 서 있던 자리가 나라를 받은 뒤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일들은 기록해 둘 업적이 아니라 살던 대로 산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그래서겠지요.
이 대목 옆에 나란히 놓아 보고 싶은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나폴리의 서민 카페에는 커피 값을 미리 내 두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 맡겨 둔 커피가 있느냐고 물으면 공짜로 한 잔을 받습니다. 값을 낸 사람은 자기가 냈다는 것은 알아도 누가 마셨는지는 모릅니다. 본문의 사람들이 몰랐던 것과는 다르지만, 값이 받을 사람의 얼굴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치러진다는 점은 닮아 보였습니다. 이 풍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먼저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왔을 거라고 그려 보게 되었습니다. 이 한 잔에서는 셈이 조금 느슨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장부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알아줄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금방 움직이고 아무도 모를 자리에서는 계산이 먼저 나서는 사람입니다. 다만 계산이 올라오는 순간을, 이제는 제가 받은 것을 잊고 장부로 사람을 보고 있다는 신호로 읽게 되었습니다. 받은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장부를 쥔 손이 조금은 풀립니다.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날을 살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에도 저를 먼저 알아보신 분이 곁에 계셨다는 것만은 잊지 않은 채로요.
이 글은 2026년 9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알아보는 눈이 생기는 순간」(마태복음 25:31-46)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