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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락하면 지는 걸까

2026년 9월 28일

옅은 크림빛 종이 여백 아래 오래된 나무 마루 끝에 쪽빛과 황토빛 보자기로 묶은 꾸러미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봉하지 않은 빈 봉투가 얹혀 있으며 곁에 감 두 알과 은행잎 하나가 놓인 수채화. 누가 먼저 오기 전에 이미 먼저 건너와 놓여 있던 손길을 나타냄

추석 연휴 마지막 날까지 주일 설교 원고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번 설교에는 처음부터 질문 하나가 따라다녔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 연락할까. 명절을 보내고 돌아온 자리에서 많은 분이 속으로 한 번쯤 해 보았을 질문입니다. 원고를 고치는 동안 그 물음은 자꾸 제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도 이 질문 앞에서 셈을 하는 사람입니다. 서운했던 쪽이 누구였는지,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꽤 정확히 기억합니다. 셈은 대개 정의감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이 먼저 있어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움직이지 않는 게 상처받지 않는 지혜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그러는 동안 상대도 저처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여러 번 읽다가 한 가지가 눈에 걸렸습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말이 누구의 일로 적혀 있는지였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사이에 그 말이 거듭 나오는데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한 번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관계를 틀어지게 한 쪽은 사람인데 먼저 나서신 쪽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에 하나 있는 명령도 무엇을 이루어 내라는 말보다는 이미 내밀어진 화목을 받으라는 말에 가깝게 읽혔습니다.

바울은 그 대목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고 적습니다. 거기서 오래 머문 물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어디로 갔을까.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주신 것이라면 화목이라는 말은 가벼워졌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자기 편지에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셔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제물이라는 말이 멀게 들리지만, 제가 서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서서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는 뜻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덮어 주신 자리는 눈감아 주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화목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저는 화목을 상대가 먼저 내놓아야 할 사과나 제가 애써 이루어야 할 성과처럼 여겨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화목은 누군가에게서 받아 내는 일도, 무언가를 이루어 얻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가 먼저 받아들여지고 예수님 때문에 저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예전처럼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치게 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은 더욱 아니고요. 다만 사과를 먼저 받아 내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 저에게는 적지 않은 위로였습니다. 제가 치러야 했던 죄의 대가가 이미 치러졌다는 걸 떠올리면, 상대에게서 받아 내겠다고 쥐고 있던 손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아픔에서 한 걸음 나올 힘도 제 결심보다 먼저 받아들여졌다는 데서 옵니다.

누가 먼저 연락할까. 그 질문 앞에서 제가 먼저 떠올리는 대답이, 이미 먼저 손 내미신 분이 계셨다는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2026년 9월 27일 주일예배 설교 「먼저 손 내미신 분이 계십니다」(고린도후서 5:18-20)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