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을 성실함이라 불러 온 밤

새벽 한 시 반, 주일 설교 아웃라인 파일이 아직 열려 있었습니다. 개천절부터 대체공휴일까지 사흘 이어지는 연휴의 첫날이었고, 이번 주일은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본문은 빌립보서 4장,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어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염려에 관한 설교를 쥐고 새벽을 넘기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습니다.
쉬는 날이 다가오면 오히려 마음이 바빠질 때가 있습니다. 몸은 멈춰도 머릿속에서는 다음 주에 할 일과 아직 정하지 못한 일들이 차례로 줄을 섭니다. 저는 이걸 오래 성실함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미리 걱정해 두면 덜 놓칠 것 같았고 걱정을 내려놓는 건 책임을 내려놓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걱정이 정말 저를 지켜 준 적이 있었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마음을 쓰는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걸린 것은 그 마음이 향하던 쪽이었습니다. 앞날을 쥐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제 손에 들려 있던 건 앞날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그걸로 제 마음을 지키겠다고 혼자 보초를 서 온 셈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갇힌 자리에서 썼다는 사실이 새삼 걸렸습니다. 살게 될지 죽게 될지도 모른 채 쓴 편지입니다. 단락 끝에 그가 적은 문장이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큰 평강이 지킨다는 말입니다. 지키는 쪽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약속에 없는 것도 보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동안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린다는 약속은 거기 없었습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을 만했습니다. 제가 받은 건 결과가 아니라 지키시는 분이었으니까요.
염려하지 말라는 말 바로 앞에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짧은 말이 놓여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곁에 계신다는 뜻이면서, 곧 다시 오실 분이라는 뜻으로도 읽혔습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같은 편지 앞부분에서 그분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자기를 위해 붙들지 않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분으로 그렸습니다. 그런 분이 제 곁에 계시다면 저 혼자 보초를 설 까닭이 없었습니다. 걱정하던 일들은 그 모양 그대로 그분께 가져가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대목에서는 오래 멈췄습니다. 이미 받은 것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모든 걸 제가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힘을 잃었습니다. 그 새벽 혼자 서 있던 자리를 그분께 넘겨 드리는 것, 아뢴다는 말이 그런 뜻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저는 설교 때문에 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너무 깊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진다면, 저는 그것을 믿음이 모자란 탓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곁의 사람에게 털어놓고 상담과 진료의 도움을 구하는 일도 그 지키심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깨어서 지키던 자리에 이미 서 계신 분이 있다면, 이번 주에는 걱정을 미리 다 해 두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글은 2026년 10월 4일 주일예배 설교 「평강이 지키시는 마음」(빌립보서 4:4-7)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