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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처럼 — 지킬수록 잃어버리는 것

디딤 · 2026년 6월 28일

손에 씨앗이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심으면 씨앗은 사라집니다. 흙 속에서 껍질이 터지고 분해되어야 싹이 납니다. 심지 않으면 씨앗은 그대로입니다. 형태를 유지합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씨앗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것도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ήν)“라는 서두로 — 요한복음 25번 등장하는, 핵심 중의 핵심을 말씀하실 때만 쓰시는 표현입니다.

죽지 않은 씨앗의 결말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헬라어 원문에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는 μόνος μένει — “혼자 거한다”입니다. 이 단어 μένω(거하다)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연합과 풍성함을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런데 여기서는 고독한 고립을 표현하는 데 쓰입니다.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기로 선택한 씨앗이 경험하는 것이 μόνος μένει — 연결이 없는 거함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것이 작동하는 것을 알지 않으십니까. 상처받지 않으려고 관계에서 조금씩 물러서다 보니 어느 날 더 외로워진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 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섬김을 계산하다 보니 신앙이 건조해지는 경험. 내 것을 잃지 않으려고 꼭 쥐었는데 이상하게 공허한 경험. 지키면 지킬수록 더 혼자가 됩니다.

집착이 부르는 것

25절이 이것을 각자의 차원으로 가져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φιλέω — 감정적 애착의 사랑. 자기 생명에 집착하는 것. 그 결과가 ἀπόλλυει — 잃어버린다, 멸망한다.

여기서 ἀπόλλυμι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ἀπόληται)**하지 않고.” 요한은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씁니다. 자기 생명에 집착하는 자가 걷는 길이 하나님이 막으시려 한 바로 그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φιλῶν ψυχήν은 악의가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충동, 본능입니다. 결심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씨앗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오늘 밀알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 바로 앞 맥락이 열쇠입니다.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오고 있다. 예수님에게 이것은 신호였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v.23). 요한복음에서 이 ’때(ὥρα)’는 일관되게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v.24의 한 알의 밀 — κόκκος —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제 보입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32절이 확증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라.”

그분은 열두 군단 천사를 불러 자기를 지키실 수 있었습니다. μόνος μένει를 선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φιλῶν ψυχήν의 길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 십자가에서, 나체로, 공개적으로, 저주받은 자로.

그 열매가 πολὺν καρπόν — 많은 열매입니다. 오늘 여기 있는 우리가 그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 이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분이 먼저 밀알처럼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그분의 자기 내어드림의 결과입니다. 공로가 아닙니다. 사랑의 응답입니다.

섬김의 새로운 정의

26절 앞부분: “나를 섬기는 자는 나를 따를 것이니.”

ἐμοὶ ἀκολουθείτω — “나를 따르라.” 현재 명령법입니다.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해서 따르라.” 섬김(διακονέω)의 방법이 따름(ἀκολουθέω)입니다.

섬김은 내가 편한 시간에,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내가 정한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M3에 있습니다 — 그분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고 계십니다

26절 끝: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τιμήσει αὐτὸν ὁ πατήρ).”

1세기는 명예-수치(honor-shame) 사회였습니다. τιμή(명예)는 사회적 생존의 핵심이었고, 십자가는 당시 최고의 공적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 낮아지는 자, 섬기는 자, 죽는 밀알을 따르는 자, 아버지가 τιμήσει하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이 있습니까. 공적 없는 헌신이 있습니까. SNS에 올리기엔 너무 평범한 자리에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새로운 명예입니다.


처음 그 씨앗으로 돌아갑니다.

심으면 잃는 것 같지만 열매가 옵니다. 쥐고 있으면 남는 것 같지만 씨앗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씨앗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열매로 여기 있습니다.

ἀκολουθείτω — 나를 따르라. 오늘 내 손에 쥔 씨앗을 땅에 내려놓으시겠습니까.